제암리 학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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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4 14:25
한자: 提巖里 虐殺事件
일본어: 提岩里教会事件(ていがんりきょうかいじけん), 提岩里事件(ていがんりじけん)
1919년 4월 15일,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교회에서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육군 헌병중위의 주도로 발생한 양민학살 사건. 제암·고주리 학살사건으로도 불린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난 가운데 제암리 인근의 개신교와 천도교, 유학자 지도자들이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여 3월 30일(혹은 4월 5일)에 제암리 인근 주민 천여 명이 제암리 발안 장터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일으켰다.
시위대가 주재소로 다가오자 일본 육군 헌병들이 출동해 경고 사격 후 칼을 마구 휘둘러 유학자 이정근과 그의 제자 2명이 칼에 맞아 사망했고 시위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천도교인과 기독교인 몇 명이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석방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흥분한 주민들이 인근의 일본인 주택, 학교에 불을 질러 정미업자 사사키를 비롯한 수십 명의 일본인들이 대피했다. 사사키는 이에 앙심을 품고 스스로 자원하여 일본 헌병의 길잡이 노릇을 하게 된다.
이에 일본은 철저한 초강경 진압 작전을 시작했다. 4월 2일 발안 장터 시위에 참여한 마을 주민들을 색출 검거하기 위해 헌병과 일본 경찰 등으로 구성된 부대를 파병해 마을들을 습격하여 불태우고 주민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일본 헌병들의 폭압에 제암리 인근 주민들은 더욱 격앙되었고 인근 화수리와 수촌리의 천도교와 기독교 지도자인 백낙열(白樂烈, 1865년 12월 20일 ~ 1937년 1월 4일)과 김교철(金敎哲, 1880년 7월 27일 ~ ?), 그리고 주민들이 주축이 되어 4월 3일, 2차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 순사 가와바타 도요타가 귀가 잘리고 치아가 뽑히고 척추가 꺾일정도로 곤봉을 두들겨 맞아 사망하였다. 일본인 남성 9명이 마을에 남기로 결정하고 40여명의 노인, 아이들이 산계리(三渓里)마을로 도주하였다.
4월 5일, 일본 육군은 수촌리에 들이닥쳐 만세시위 주동자를 색출한다면서 주민들을 마구 학살하고 마을 가옥 42호 중에 38호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수촌리에서 교회당이 불타고 사람들이 죽거나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개신교 선교사들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수촌리를 찾았다. 이들 중에는 영국계 캐나다인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1889년3월 15일 ~ 1970년 4월 16일, 한국명 석호필)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4월 5일 발안 장날이 되자 만세시위운동이 다시 일어났다. 이러자 일본 육군은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육군 헌병중위가 지휘하는 부대를 4월 13일 제암리로 보내 만세시위운동 주모자들을 색출하도록 지시했다. 이 과정에서 아리타 중위는 15세 이상의 제암리 주민들을 모두 교회당으로 모이게 했는데 "만세시위 진압 과정에서 너무 심한 매질을 한 걸 사과하러 왔다." 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이미 아리타는 사사키 등을 통하여 제암리 개신교인들의 명단을 확보한 상황이었고, 아리타가 교회당을 나서는 것을 신호로 일본군은 교회당에 사격을 시작하는 동시에 짚더미와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불을 지른 과정에서 민가 28채가 소실되었다. 바람이 거세 교회당 아래의 민가로 불이 번졌고 교회당 위쪽으로는 일본군들이 불을 질렀다. 당초 알려지기로는 일본군이 교회당 안에 있던 사람들을 못 나오게 하려고 문에 못질을 했다고 하나, 정황적으로나 탈출하다가 사망한 사람들이 있는 걸로 보면 못질은 하지 않은 듯하다. 한 여인이 안고 있던 아기라도 살리려고 창문 너머로 던지자, 밖에 있던 일본 군인이 떨어지는 아기를 향해 총검을 내질러, 아기조차 잔혹하게 학살하였다고 한다.
22명이 교회당 안에서 사망했으며, 3명이 교회당에서 탈출하던 중 2명은 사망하고, 1명은 산으로 피신하여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다음날 일부 군인들은 고주리로 가서 화성지역의 천도교 지도자였던 김홍렬 일가족 6명도 살해했다. 불 탄 집에 들어갔을 땐 "...이게 니 뼉다구인지 내 뼉다구인지도 모르겄고..."의 상태로, 말 그대로 참혹 그 자체였다. 결과적으로 무고한 양민 28명이 학살당하였다.
현재도 남아 있는 제암리 교회에선, 영상물과 교육자료 등을 통해 이 외에 제암리 학살사건 당시의 내용을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가끔 시간만 잘 맞추면 당시 생존자의 후손들도 종종 만나볼 수 있다.
묻힐 뻔한 이 사건은 수촌리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을 파악하기 위해 수촌리로 가던 스코필드가 "제암리에서도 학살 사건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제암리로 달려가 상황을 파악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스코필드는 유골을 수습하는 한편 제암리 학살의 증거들을 사진으로 찍고 《꺼지지 않는 불꽃(Unquenchable Fire)》이라는 보고서를 저술해 전 세계에 제암리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을 폭로했다.
제암리 학살 사건이 알려져 국제적 여론이 악화되자, 일본은 제암리 학살을 지휘한 아리타 중위에게 30일의 중근신 처분만 내리고 사태를 덮으려 했다. 그러나 제암리 학살 사건이 전 세계적으로 알려져, 일본에 대한 세계의 여론은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일본은 "아리타 중위가 미숙하고 주민들이 저항하여 우발적으로 사건이 발생했다"고 주장했으며, 후일 일뽕 김완섭은 '당시 조선 땅에 일본군이 없었는데 어떤 일본군이 학살을 하나?'라는 황당한 주장을 하며 일본측을 옹호하는 웃지 못할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사실 김완섭을 제외하더라도, 일부 일뽕이나 일본의 극우 네티즌들은 이것 역시 "법을 어기고 불법집회를 열다 경찰을 살해했으니 당연히 폭동"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불법시위. 혹은 이 사건을 경찰관을 죽인 범죄자를 진압한 사건 쯤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조선 주둔 일본 육군이 "조선군" 이라는 이름으로 주둔해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이 중 헌병 병력 일부는 일반 치안 임무를 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김완섭은 "이들은 치안 업무에 종사했으니 군인이 아니라 경찰"이라고 우겼지만, 이들은 경찰 업무 뿐만 아니라 헌병 업무까지 하고 있었던 것도 분명하며, 엄연히 이들의 법적 신분은 군인이다. 더욱이 당시 조선 주둔군 사령관인 우쓰노미야 다로 장군의 일기가 발견되면서 일본이 제암리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리고 관여한 군인들은 30일간 근신처분을 받았고, 나중에 군법회의 결과 살인, 방화에 대해 무죄 처분을 받았다.
해방이 되기 전까지 제암리 사건은 언급조차 못했고, 1959년이 되어서야 추모비를 세울 수 있었다. 1969년에는 일본의 기독교인들이 사죄의 의미로 제암리 교회당을 재건했는데, 일본 기독교인들은 이미 사건 직후부터 현장을 찾아 사건의 전모를 확인하고 일본 내 기독교신문에 고발 기사나 추도시를 실었었다. 50년 동안 나 몰라라 한 건 아니다. 이 교회당은 2002년 제암리 3.1 운동 순국기념관을 지으면서 헐렸는데, 상공에서 바라보면 3자와 1자가 보였다고 한다.
이 사건을 폭로한 스코필드 교수는 후에도 한국인을 돕다가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출국 당했지만, 1968년 건국공로훈장을 수여받았고 외국인으로써는 최초로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이 사건과 신사참배에 관한 삽질 때문인지 훗날 한국에서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실시할 당시, 가장 격렬하게 반대하던 단체 중 하나가 개신교 교단들이기도 했다.[6]
도쿄대학 영문과 교수와 도쿄여자대학 학장으로 재직한 영문학자 사이토 이사무(斎藤勇, 1887년 2월 3일 ~ 1982년 7월 4일)는 자국 군인이 저지른 잔인함에 대한 비판과 처참하게 살해당한 조선 백성들에게 조의를 담은 〈어떤 살육사건(或る殺戮事件)〉이라는 작품을 1919년 5월 22일, 《복음신보(福音新報)》지에 발표하기도 하였다.
일본어: 提岩里教会事件(ていがんりきょうかいじけん), 提岩里事件(ていがんりじけん)
1919년 4월 15일,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교회에서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육군 헌병중위의 주도로 발생한 양민학살 사건. 제암·고주리 학살사건으로도 불린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난 가운데 제암리 인근의 개신교와 천도교, 유학자 지도자들이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여 3월 30일(혹은 4월 5일)에 제암리 인근 주민 천여 명이 제암리 발안 장터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일으켰다.
시위대가 주재소로 다가오자 일본 육군 헌병들이 출동해 경고 사격 후 칼을 마구 휘둘러 유학자 이정근과 그의 제자 2명이 칼에 맞아 사망했고 시위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천도교인과 기독교인 몇 명이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석방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흥분한 주민들이 인근의 일본인 주택, 학교에 불을 질러 정미업자 사사키를 비롯한 수십 명의 일본인들이 대피했다. 사사키는 이에 앙심을 품고 스스로 자원하여 일본 헌병의 길잡이 노릇을 하게 된다.
이에 일본은 철저한 초강경 진압 작전을 시작했다. 4월 2일 발안 장터 시위에 참여한 마을 주민들을 색출 검거하기 위해 헌병과 일본 경찰 등으로 구성된 부대를 파병해 마을들을 습격하여 불태우고 주민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일본 헌병들의 폭압에 제암리 인근 주민들은 더욱 격앙되었고 인근 화수리와 수촌리의 천도교와 기독교 지도자인 백낙열(白樂烈, 1865년 12월 20일 ~ 1937년 1월 4일)과 김교철(金敎哲, 1880년 7월 27일 ~ ?), 그리고 주민들이 주축이 되어 4월 3일, 2차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 순사 가와바타 도요타가 귀가 잘리고 치아가 뽑히고 척추가 꺾일정도로 곤봉을 두들겨 맞아 사망하였다. 일본인 남성 9명이 마을에 남기로 결정하고 40여명의 노인, 아이들이 산계리(三渓里)마을로 도주하였다.
4월 5일, 일본 육군은 수촌리에 들이닥쳐 만세시위 주동자를 색출한다면서 주민들을 마구 학살하고 마을 가옥 42호 중에 38호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수촌리에서 교회당이 불타고 사람들이 죽거나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개신교 선교사들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수촌리를 찾았다. 이들 중에는 영국계 캐나다인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1889년3월 15일 ~ 1970년 4월 16일, 한국명 석호필)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4월 5일 발안 장날이 되자 만세시위운동이 다시 일어났다. 이러자 일본 육군은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육군 헌병중위가 지휘하는 부대를 4월 13일 제암리로 보내 만세시위운동 주모자들을 색출하도록 지시했다. 이 과정에서 아리타 중위는 15세 이상의 제암리 주민들을 모두 교회당으로 모이게 했는데 "만세시위 진압 과정에서 너무 심한 매질을 한 걸 사과하러 왔다." 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이미 아리타는 사사키 등을 통하여 제암리 개신교인들의 명단을 확보한 상황이었고, 아리타가 교회당을 나서는 것을 신호로 일본군은 교회당에 사격을 시작하는 동시에 짚더미와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불을 지른 과정에서 민가 28채가 소실되었다. 바람이 거세 교회당 아래의 민가로 불이 번졌고 교회당 위쪽으로는 일본군들이 불을 질렀다. 당초 알려지기로는 일본군이 교회당 안에 있던 사람들을 못 나오게 하려고 문에 못질을 했다고 하나, 정황적으로나 탈출하다가 사망한 사람들이 있는 걸로 보면 못질은 하지 않은 듯하다. 한 여인이 안고 있던 아기라도 살리려고 창문 너머로 던지자, 밖에 있던 일본 군인이 떨어지는 아기를 향해 총검을 내질러, 아기조차 잔혹하게 학살하였다고 한다.
22명이 교회당 안에서 사망했으며, 3명이 교회당에서 탈출하던 중 2명은 사망하고, 1명은 산으로 피신하여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다음날 일부 군인들은 고주리로 가서 화성지역의 천도교 지도자였던 김홍렬 일가족 6명도 살해했다. 불 탄 집에 들어갔을 땐 "...이게 니 뼉다구인지 내 뼉다구인지도 모르겄고..."의 상태로, 말 그대로 참혹 그 자체였다. 결과적으로 무고한 양민 28명이 학살당하였다.
현재도 남아 있는 제암리 교회에선, 영상물과 교육자료 등을 통해 이 외에 제암리 학살사건 당시의 내용을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가끔 시간만 잘 맞추면 당시 생존자의 후손들도 종종 만나볼 수 있다.
묻힐 뻔한 이 사건은 수촌리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을 파악하기 위해 수촌리로 가던 스코필드가 "제암리에서도 학살 사건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제암리로 달려가 상황을 파악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스코필드는 유골을 수습하는 한편 제암리 학살의 증거들을 사진으로 찍고 《꺼지지 않는 불꽃(Unquenchable Fire)》이라는 보고서를 저술해 전 세계에 제암리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을 폭로했다.
제암리 학살 사건이 알려져 국제적 여론이 악화되자, 일본은 제암리 학살을 지휘한 아리타 중위에게 30일의 중근신 처분만 내리고 사태를 덮으려 했다. 그러나 제암리 학살 사건이 전 세계적으로 알려져, 일본에 대한 세계의 여론은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일본은 "아리타 중위가 미숙하고 주민들이 저항하여 우발적으로 사건이 발생했다"고 주장했으며, 후일 일뽕 김완섭은 '당시 조선 땅에 일본군이 없었는데 어떤 일본군이 학살을 하나?'라는 황당한 주장을 하며 일본측을 옹호하는 웃지 못할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사실 김완섭을 제외하더라도, 일부 일뽕이나 일본의 극우 네티즌들은 이것 역시 "법을 어기고 불법집회를 열다 경찰을 살해했으니 당연히 폭동"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불법시위. 혹은 이 사건을 경찰관을 죽인 범죄자를 진압한 사건 쯤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조선 주둔 일본 육군이 "조선군" 이라는 이름으로 주둔해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이 중 헌병 병력 일부는 일반 치안 임무를 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김완섭은 "이들은 치안 업무에 종사했으니 군인이 아니라 경찰"이라고 우겼지만, 이들은 경찰 업무 뿐만 아니라 헌병 업무까지 하고 있었던 것도 분명하며, 엄연히 이들의 법적 신분은 군인이다. 더욱이 당시 조선 주둔군 사령관인 우쓰노미야 다로 장군의 일기가 발견되면서 일본이 제암리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리고 관여한 군인들은 30일간 근신처분을 받았고, 나중에 군법회의 결과 살인, 방화에 대해 무죄 처분을 받았다.
해방이 되기 전까지 제암리 사건은 언급조차 못했고, 1959년이 되어서야 추모비를 세울 수 있었다. 1969년에는 일본의 기독교인들이 사죄의 의미로 제암리 교회당을 재건했는데, 일본 기독교인들은 이미 사건 직후부터 현장을 찾아 사건의 전모를 확인하고 일본 내 기독교신문에 고발 기사나 추도시를 실었었다. 50년 동안 나 몰라라 한 건 아니다. 이 교회당은 2002년 제암리 3.1 운동 순국기념관을 지으면서 헐렸는데, 상공에서 바라보면 3자와 1자가 보였다고 한다.
이 사건을 폭로한 스코필드 교수는 후에도 한국인을 돕다가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출국 당했지만, 1968년 건국공로훈장을 수여받았고 외국인으로써는 최초로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이 사건과 신사참배에 관한 삽질 때문인지 훗날 한국에서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실시할 당시, 가장 격렬하게 반대하던 단체 중 하나가 개신교 교단들이기도 했다.[6]
도쿄대학 영문과 교수와 도쿄여자대학 학장으로 재직한 영문학자 사이토 이사무(斎藤勇, 1887년 2월 3일 ~ 1982년 7월 4일)는 자국 군인이 저지른 잔인함에 대한 비판과 처참하게 살해당한 조선 백성들에게 조의를 담은 〈어떤 살육사건(或る殺戮事件)〉이라는 작품을 1919년 5월 22일, 《복음신보(福音新報)》지에 발표하기도 하였다.